주일낮예배설교

막힌 담을 헐려고

꿈지기의사랑 2021. 1. 16. 15:42

에베소서 2:11-22(참고 마태복음 12:22-32, 에스겔 37:15-23)

 

들어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현절 둘째주를 맞아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대면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함께 예배할 수 있는 시간이 속히 오기를 소망해 봅니다. 영어 단어중에 프레임('틀'/인식의 방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을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인식의 체계화라고 할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편리함을 줄 수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때로 누군가에게 이 생각의 틀을 통해서 해를 가할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본문에는 이 인식의 방법을 '막힌 담'이라 표현하고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차별하는 '생각'으로 표현되어져 있습니다. 누군가를 모함하거나 평가하기 위해서 자기들이 만들어낸 어떤 틀에 사람들을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선으로 누군가를 평가해 버리는 것을 '담', '차별의 생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에스겔서에는 짝을 이루는 막대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라:Remember/μνημονεύω(므네모뉴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생각하라'는 화두를 던지면서 그들에게 '이방인'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소개합니다. 육체로는 이방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받는 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할례를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과의 계약을 통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받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난지 8일만에 행하는 할례를 철저히 지켰습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도시중의 하나입니다. 상업의 중심지였고, 아데미 신상들을 섬기는 미신숭배와 황제숭배를 하는 곳이 었으며, 소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할례로 하자면 이방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에베소 교인들 역시도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고 여겨져 왔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즉 그들도 할례라고 하는 육체적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구원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여김 받아왔다는 것이며, 차별되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는 외인, 세상에서 소망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 전에 멀리 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 에베소 교인들과 같은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평가였다는 것입니다. 차별이라는 '담'이 유대인과 이방 사이에 깊은 골이 되어서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인데, 이방인은 그렇지 못한 자들로 여겨진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12장에서는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들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즉 '죄인'이라는 인식의 틀이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귀신에 들리고, 말 못하게 된 자들이라고 그들을 규정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부터도, 모든 관계의 자리로부터 그들을 외로움과 소외의 자리로 내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귀신의 왕 바알 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것이다'라는 프레임을 씌워서 예수를 핍박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에스겔 37장에서도 막대기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다른 막대기에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이라 적음으로 남과 북왕국으로 분단된 그들의 현실을 하나로 화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에스겔을 통해서 전달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방인과 같은 존재들, 교만과 거짓에 치우친 모습(시편 40:4)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막힌 담을 허는 길 예수 그리스도

 

   막힌 담은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 담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 땅에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간격을 좁힐 수 없을 것 같던 그들의 사이를 회복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화평, 곧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현현(주현) 하셨기 때문에 화목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사이를 항상 갈라 놓으려 합니다. 우리 사이의 갈라진 것들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말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께는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안식일 논쟁에서나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는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그들의 아픔과 그들의 배고픔과 그 아픔속에 있는 이들에게 관심과 초점이 있다면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사로잡혀 왜 그들이 안식을 범하는 것인지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담을 세워놓고 그들이 왜 담 너머로 오지 않는지를 묻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끊임없이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들의 배고픔, 그들의 아픔, 그들의 외로움, 그들의 상처와 같이 사람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보이고 그들에게 반응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창조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함께 어우려져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존재들인데, 그들이 육체의 할례의 문제로, 서로를 차별하고, 소외 시키고, 외면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어 십자가를 통해 죽으심으로 그들이 화평을 회복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들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 한 몸, 연합을 이루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8),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19)

  에스겔은 37장에서 예루살렘이 최후 공격을 받기 이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는데, 그는 예언, 비유, 상징, 표징 등을 사용하여 포로가 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극적으로 전달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마른 뼈가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불러 모아, 생명을 불어 넣어 회복시키시고, 다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17절)

   그들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사탄의 역사, 생명이 하나 되는 것을 훼방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길을 가로 막고, 형제가 하나 되는 것을 가로막고 분열 시키는 사탄의 역사로 부터 우리 스스로 멀어져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삶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길,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원하시기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의 삶에 나타나셔서 막힌 담을 허신 것입니다.

 

성령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자

 

   막힌 담, 차별의 벽이 무너지면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아래 살아가게 됩니다. 에스겔은 37장에서 이러한 모습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22-23절)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지고,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별없이 하나를 이루어 화목하게 되는 삶을 살아가라 말하십니다. 이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하나님의 언약과 그것의 성취를 통한 터전 위에서 모퉁이 돌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갑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매일의 우리의 삶 속에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면, 우리는 유혹도 이겨내고 막힌 담도 허물 수 있고 신뢰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발걸음을 가로막는 것이 있습니다. 사탄의 훼방입니다.  회개를 촉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입니다. 명백한 성령의 사역임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모욕하고 매도하는 죄를 뜻합니다.(마태복음의 성령훼방죄)

  서로간의 신뢰를 회복하고 막힌 담을 허물고 하나님의 평화가 임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매일의 우리의 일상에서 사탄의 훼방을 물리치고,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