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와 아론을 원망함
출애굽기 5:10-21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통치와 바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것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통치의 차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오늘의 이야기의 주제는 아마도 이것이 아닐까 생각이 되어진다. 이 관계를 볼 수 있다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이것은 단순히 애굽만의 통치 방식은 아닐 것이다. 제국주의를 표방하던 나라들이 사용한 방법일 것이다. 그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고 사탄의 역사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오늘 우리의 성경 알기의 목표가 될 것 같다. 자 그럼 말씀 속으로 들어가 보자.
모세와 아론 그리고 백성들의 관계
절망에 빠져 자신의 삶에 안주하며 살아가던 모세를 하나님은 부르셨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나?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히브리 노예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눈으로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정을 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는 그들의 음성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결단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부른 사람이 누구인가 모세이다. 그리고 그 모세를 도와 그의 입이 되어주기 위한 동역자가 아론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합력해서 장로들을 설득하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전달함으로 인해서 그들이 하나되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시작점을 만들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나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바로에게 찾아갔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광야로 나가기를 원하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모세의 단독적인 행동이 아니다. 하나님, 모세,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서 전달하는 소리였다. 모세의 말을 잘 듣고 믿어 그들은 하나의 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유기체 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제국의 노예들이 더 이상 바로왕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 아래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들은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되어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분열을 조장하는 바로
그들의 하나됨은 바로에게는 위협이었다. 그래서 바로는 통치술을 발휘한다. 그 방법은 바로 분열이다. 고역으로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고역에 시달린 노예들이 도로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하며 배척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짚을 주지 않겠다는 감독관들과 기록원들의 선언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제국의 노예들이 황제를 임금으로 고백하지 않고 오히려 야훼 하나님을 임금으로 고백했다는 것은 제국의 통치체제에대한 강한 저항의 이념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의 관료들은 바로가 명령한 대로 이행해야 한다. 감독들이 히브리인이라 하더라도 왕의 명령을 수행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바로는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죽음의 세력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고 사랑하는 생명의 참된 주권자이시다.
히브리 노예들은 심한 박해가 닥쳐옴을 직감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군주가 이제 마음을 먹고 박해하려 나섰으니 앞으로 고생문이 활짝 열렸다. 그들은 짚 대신에 곡초 그루터기를 주워 모으려고 애굽 온 땅에 흩어졌다. 바로는 직접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정책을 통해 교묘히 박해를 한다. 몸으로 흩어져 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마음이 흩어져가는 모습마저 보인다. 짚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짚을 주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의 벽돌 생산량을 맞추어 제출하라며 백성들을 '몰아친다.' 억지스러운 일이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바로의 일상화된 폭력성을 보여준다. 바로의 감독들이 할 의무(벽돌의 수효)를 다하지 못했다며 이스라엘 자손의 기록원들을 때린다. 작업에 필요한 재료도 주지 않으면서 생산량을 채우라는 독촉은 트집을 잡아 괴롭히려는 것이다. 고생을 시킴으로써 자유를 향한 염원을 잠재우려는 바로의 악한 통치술이다. 애굽의 바로는 노예들을 착취하고 억압을 통해 분열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시선의 전환을 통한 통치
이스라엘은 야훼 하나님에게 부르짖을 줄 모르고 있다. 자기들을 박해하는 권력자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오해한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기에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고 하나님에게로 귀의한다는 진리를 그들은 모르고 있다. 이것을 알았다는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것이다. 그들은 바로에게 가서 호소하고 있다. '바로가 폭력의 원흉임을 이스라엘이 모르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바로에게 가서 그의 종들인 감독들을 고발한다. 당신의 종들에게 벽들을 만들 짚을 주지도 않으면서 말하기를 '우리를 위해서 일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바로에게 탄원하면서 애굽인 감독자들의 횡포를 고소한다. 그 폭력의 원흉이 바로인데도 바로가 선한 통치자인줄 착각하고 있다.(이영재/해방의 하나님) 바로의 백성이 죄를 짓고 있다 고소한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시선을 자신의 백성이 감독들에게로 돌림으로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자신의 죄를 감추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게으르다 게으르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탄원을듣고 보살펴주기는커녕 화를 벌컥 낸다. 백성들은 이제야 아차! 싶었을 것이다. 폭정의 원흉을 발견한 것이다. 감독들의 폭력이 아니라 바로의 지시에 의한 박해였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영재는 이 모습을 '의식화'를 통해 그들을 세뇌시킨 것이라 한다. 일제가 우리를 통치하며 황국신민이며 일본이 우리에게 다양한 것을 제공하고 있다고 거짓을 선동한 것과 다르지 않다.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라는 것이 있다. 즉 황국신민맹세이다. 황국 신민화 정책으로 일본 제국이 1937년에 만들어내 조선인들에게 외우게 한 맹세이다. 학교를 비롯한 관공서, 은행, 공장, 상점 등 모든 직장의 조회, 기타 회합 등에서 제창되었다. 아동용과 성인용이 있다. 여기서는 아동용을 살펴보기로 하자(자세한사항은 황국신민서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이곳을 참고하기 바란다.)
-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臣民)입니다.
-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 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노예인 주제에 야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한다는 종교행위 자체가 권력자 바로의 눈에는 게으름의 소치로 보였다. 노예는 노예노동에 충실해야 사회가 제대로 돌아간다. 바로는 모든 신민이 국가관을 분명하게 새기며 살것을 요구한다. 국가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저마다 서 있는 위치에 충실하게 자신의 기능을 잘 수행해야 한다고 권력자는 믿는다. 노예는 노예의 일을 잘 감당해야 사회가 잘 지탱된다 주장하는 것이다.
바로는 단호하게 히브리 노예들의 탄원을 거절한다. 민중에게 애국주의를 강요하면서도 그들을 결코 신뢰하지 않는 모습이다. 민중을 사회의 불만세력으로 간주하고 항상 감시하고 제어하려 든다. 그들과 하나 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백성의 원망
기록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말씀을 선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세와 아론의 말씀 선포의 결과로 사태가 더 악화되자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재치고 바로에게 직접 탄원한다. 하나님을 불신하니 모세와 아론도 불신하게 된 것이다. 그들 스스로 해결하려다 더욱 사태가 악화되었다. 나오는 그들을 모세와 아론은 기다리고 있었다. 이영재는 이스라엘에 아직 계통도 질서도 없고 하나님과 그의 사자에 대한 경외심도 없는 그들을 제지하고 계통을 세우기 위해서라 말한다. 모세와 아론은 그들을 지도하려고 기다렸다고 된통 당하게 되었다. 히브리 십장들(기록자들)은 자신들이 차별당하는 역겨운 존재로 전락했다면서 그 모든 것이 모세와 아론의 탓이라 비난한다. 서로 하나가 되어 고난의 상황을 타게해야 할 사람들이 서로분열되어 서로를 원망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서로를 원망하고 비난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며 서로 존중하며 위로하며 합심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