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맡은 청지기
베드로전서 4:1-11
육체의 고난(1-6절)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일까?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은 죽음과 죄와 허무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나라'에 대한 '살아 있는 소망'을 지금 여기서 분명히 누리고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아직' 온전히 성취되지 않은 '소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표현한다. (벧전 1:4) 하나님의 나라-썩지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 즉 죽음의 지배 아래에 있어서 썩어가고, 죄의 지배 아래에 있어서 더러워지며 하나님 없이 허무한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믿음을 통해서 받은 '살아 있는 소망'과 그 소망의 대상인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거룩, 영원을 가지고 있기에 본질상 이 세상에 속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임시거주자와 여행자'로 지나가는 과정 속에 있다. 이 여정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타나시면 끝이 난다. 공간적으로는 하늘 보좌에 이르는 것이고 시간적으로는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종말론에 입각한 '외국인과 여행자 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을 믿음으로 시작해서, 세상 속에서 '목자와 감독'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십자가와 영광의 길, 곧 선한 양심의 길을 따라 하나님의 보좌 앞에까지 이르는 여정이요 기간이 된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받고 살아갑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왜 고난을 받게 되는 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거듭난' 심령 속에 있는 '살아 있는 소망'을 따라 그의 다시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그가 승천하여 앉아 있는 하늘의 보좌 앞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을 지나가는데,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길이다. 이 길은 부활과 승천의 영광에 이르는 십자가의 고난의 길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이 땅에 오셔서 먼저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다. 그리고 속량할 수 없는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다. 과거의 우리의 삶은 이방인의 삶과 같았다. 하고싶어하는 일을 행한다. 즉 욕정대로 삶-음란, 정욕, 술취함, 방탕, 향락,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을 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육체의 고난(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죄와의 인연을 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 마음의 각오를 다지고 십자가의 길을 살아가기에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우리의 모습을 낯설어 한다. 그 낯섬의로 인해서 우리는 비난하는 것과 같은 시험과 연단과 따돌림과 고난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모습속에서 겪게되는 고난입니다. 이러한 고난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가지 정해진 시한부의 시간 속에서 겪게되는 고난이기에 지나가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고난에 좌절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낯섬으로 겪었던 고난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들과 우리의 상황이 역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은혜를 맡은 청지기(7-8절)
제사장으로서 교회가 갖추어야 할 마음은 무엇일까? 종말의 신앙으로 깨어 있는 것이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7절) 하나님의 심판의 때, 종말의 시간이 가까이 와서 우리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아 고난을 겪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 모습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 일시적인 고난에 휘둘리지 말고 사리를 분별하고 정신을 차려서 세상에 속지 말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깨어서 기도하는 삶이다. 그리스도의 육체의 고난을 통해서 죄를 그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낸 것 처럼, 각오를 다지고 마음을 다잡아 정욕을 따르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 해야 한다. 그 길을 가기 위한 것이 기도이다. 이렇게 깨어 기도하는 사람이야 말로 사랑할 수 있다. 이러한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믿음의 형제들이 해야 할 일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이웃을 존중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로 고난의 시간을 함께 겪는 믿음의 형제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한 뜻을 품고 서로 '형제애'로서 사랑하며, 피차 하나님의 긍휼로 '불쌍히 여기고' 그런 긍휼로 서로를 대하여 '자신을 낮추어' 섬겨야 한다. 8절의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서로를 향해 실패하지 않는 사랑을 갖고'가 된다. 즉 '사랑을 지속적으로 계속하라'는 뜻이다. 세상에서 낯선 이방인 대접을 받고 비방과 차별, 모욕과 불이익을 당하는 같은 믿음의 형제들 사이에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것은 은혜로 유야무야 죄를 덮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진정한 회복은 죄의 고백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죄인을 피를 통해 죄를 용서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회복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죄인을 품은 공동체가 그와 더불어 죄를 참회하며 회해하여 돌이키는 눈물과 수고가 동반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삶으로(9-11)
사랑하는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대접하고(9절)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10절),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서로를 섬김으로써 함께 교회를 세워가는 공동체로 나타난다. 세상에서 '임시 거주 외국인이요, 여행자'된 믿음의 형제들을 교회 안에서는 특별히 환대하고 영접하며 섬겨서 그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집 안에서는 그들이 전혀 낯선 이방인이 아님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각기 은사를 주시고 그들 각자를 통해서 친히 역사하신다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원리가 모든 믿는이들이 각기 은사를 통해 제사장의 역할을 한다는 것과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몸, 즉 우리의 집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집의 청지기이다. 집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우리에게 주신 권한과 은사와 책임을 맡아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받은 은사를 따라 섬기도록 격려하고 돌아보자.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섬기는 본을 보여 주며, 모두가 함께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게 하자. 집안의 모든 자녀들이 함께 일하여 집을 세우는 하나님의 주권을 통하여 모든 성도가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